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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淡蘭)고도는 청조 시기 북대만 「단수이청」에서 「거마란청」사이에 왕래하던 중요한 노선으로 타이베이(台北)시, 신베이(新北)시, 지룽(基隆)시와 이란(宜蘭)현을 지나는 길이어서 북대만의 풍부한 역사 기억을 탑재하고 있다.
북로는 가장 먼저 발전하고 사료 기재가 가장 많은 구간이다. 선민들이 수렵시대를 거쳐 산길을 따라 이동할 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그 기능이 점차 관청에서 난을 평정하고 시찰하며 방위를 하던 통도로 변했으며 관병이 정기적으로 시찰할 때 안전 통행을 확보하고 민간인들의 통행, 통상, 개척, 보수를 빨리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여러 갈래로 정비했다. 현재는 정부와 민간이 합작하여 북로를 따라 역사 맥락을 정리해 「찬광랴오 옛길(燦光寮古徑)」, 「양팅리 고도(楊廷理古道)」, 「루란정도(入蘭正道)」의 3가지 옛길을 정비하였다.
중로는 생활민의 길로 관방의 역사기록이 적고 현재 사료에서 기재된 「란루산궁도(蘭入山孔道)」와 「황쭝다핑(黃總大坪)」 옛길과 취락개척, 농산종식 및 운반판매 과정으로 고찰하여 단란 중로의 길을 건립했다. 현재는 「놘둥 옛길(暖東舊道)」과 「란루산궁도」의 2대 옛길로 나누어진다.
남로는 청조시기의 중요한 경제 차로이다. 초기 관부에서는 길을 개척하려 의견을 올렸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선민들이 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가 차를 재배하고 그 후 대만이 개항되면서 통상이 시작되자 엽차가 당시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 되어 관부에서 이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만 순무 류밍촨(劉銘傳)이 이 산길을 따라 큰 길을 개척해 이란(宜蘭)까지 통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남로는 「단란편도」라고도 칭해진다.
단란 이야기
1723년: 「단수이청」설립
단수이청(淡水廳)의 설립이 「단」란의 기점으로 당시 대만의 발전이 이미 남으로부터 북으로 확대되었음을 말해준다.
1788년:남로의 초보적인 개발
린솽원(林爽文)의 반란으로 인해 〈단란길 개척 건의〉가 있었으나 경비부족으로 건설되지는 못했다.
1795년: 브랜즈가 북(北), 중로(中路) 두 길을 개발
놘놘(暖暖)에서부터 싼댜오링(三貂嶺), 딩솽시(頂雙溪, 평포족이 사냥하면서 생긴 산길)까지, 후인들에게는 브랜즈가 단란고도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1796년:우사(吳沙)가 이란평원 개간
한인과 개척된 토지가 많아지면서 원주민의 저항이 시작되어 충돌이 지속되었다. 이후 우사(吳沙)가 화해의 안을 내고 개인적인 개척을 제한하면서 이란평원(宜蘭平原)이 순조롭게 개발되었다.
1807년:양팅리(楊廷理)가 반란을 평정
북부해안을 따라 해적이 창궐하였는데 지부(知府)였던 양팅리(楊廷理)가 이를 평정하고 길을 따라 방위에 힘쓴 이후 주변에 점차 취락과 도로가 형성되어 오늘날의 「양팅리고도」가 되었다.
1810년: 남로(엽차길)의 최초 기원
중국 복건성 징롄허우(井連侯), 커차오(柯朝)가 엽차 싹을 들여와 선컹(深坑)에 심어 재배했는데 점차 타오위안(桃園), 신주(新竹) 등지로 퍼져 나갔다.
1812년: 「거마란청」설립
단수이청(淡水廳)과 거마란청(噶瑪蘭廳) 사이에 공문의 전송이 필요해지자 이를 위해 단란고도 북로(北路)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1824년: 황팅타이(黃廷泰)가 사람들을 이끌고 입산하여 개간
황팅타이(黃廷泰)는 터우웨이(頭圍)에서 타이핑(泰平)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개간하다가 이곳이 매우 넓고 평탄한 지형임을 알고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개간을 시작했다. 구릉지라 녹나무를 벌목하고 평탄한 하천가에 벼와 고구마 등을 심었는데 이는 이후 현지 주민들의 주요한 경제작물이 되었다.
1850년: 장저우, 취안저우 싸움
장저우(漳州), 취안저우(泉州) 사람들은 대만에 이주해 온 양대 족군으로 장기간 경작지와 수원 등을 둘러싸고 무장충돌이 발생하였는데 1860년 이후에야 조금 뜸해졌다. 단란고도 중로는 이 이주민들이 개간과 개척하는 과정에서의 발생한 충돌과 화해의 과정을 보여준다.
1860년:대만의 개항과 통상
청조정은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단수이와 지룽 등 항구를 개방하고 통상하여 대만의 경제 무역에서 점차 엽차가 대종이 되었다. 이로 인해 시장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간접적으로 단란 남로(엽차길)의 개척이 이루어졌다.
1867년: 류밍등(劉明燈)의 싼댜오링, 차오링 역사유적
류밍등(劉明燈)이 거마란(噶瑪蘭)을 순찰할 때 싼댜오링(三貂嶺)에 「금자비(金字碑)」를, 차오링(草嶺)에 「슝전만옌(雄鎮蠻煙)」비와 「호자비(虎字碑)」를 세워 역사유적을 남겼는데 이는 관도의 증거가 되었다.
1872년: 멕케이 박사가 대만으로 와서 전도
멕케이 박사는 1872년 대만에 와서 초기 단수이하, 신덴계, 지룽하 일대에서 전도를 했고 이후 이란(宜蘭), 쑤아오(蘇澳)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그가 남긴 족적과 기록 역시 단란의 역사와 노선의 중요한 사료이다.
1885년: 류밍촨(劉銘傳) 순무가 단란보도를 개척
1885년 대만성을 건립하고 류밍촨(劉銘傳)이 첫 대만순무(臺灣巡撫)를 역임했다. 엽차가 가져온 경제성장에 따라 관청에서도 단란보도의 개척공사를 강화하였다. 이 노선은 거마란까지의 여정을 대폭적으로 단축시켰는데 현재의 타이베이와 이란 간의 중요 교통로가 되었다.